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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채 박사는 농업 및 농촌 그리고 4-H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전국을 누비며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정 명 채 지도자 (전 한국농수산대학 총장)
정명채(67) 박사는 “4-H 때문에 농민운동에 심취하게 됐으며, 전공 또한 농학에서 농업경제학, 사회경제학으로 방향을 폭넓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평생 농업 발전과 농업인의 복지를 위해 살아온 그는 지금도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있다.
한국4-H본부가 실시한 충북과 충남 지역본부 역량강화를 위한 순회교육에서 특강을 한 그는 “4-H는 국가가 어려울 때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라를 살린 구국의 운동이었다”고 말하고, 농업의 개방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업과 잃어버린 식량주권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한 뒤 “우리 농업과 국민의 식탁을 지켜나가기 위해 4-H가 다시 구국의 결단을 할 때”라고 강조했다. 농업과 농업인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묻어나는 그의 강의는 청중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을4-H회, 대학4-H회 출신
정 박사는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초등학교 사택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이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목도초와 목도중, 충주고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1년간 농사를 지었다. 이때 탑촌4-H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농업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그는 충북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충북대에는 4-H회가 있기는 했으나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4-H회였다. 1학년인 정 박사는 직접 회원을 모집해 대학4-H활동을 펼치는 한편 전국대학4-H연구회연합회에도 참여했다.
당시 대학4-H는 매년 종합연구논문발표대회인 ‘클로버의 향연’을 열었다. 정 박사는 여기서 만난 김준기, 황민영 선배와 건국대 김병태 교수의 영향으로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 농업이 좋은 기술과 많은 생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판매와 가격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갖게 된 그는 농학에서 농경제학으로 자신의 진로를 설정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4-H를 비롯한 왕성한 활동을 한 정 박사는 주위의 압력에 의해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으나 매년 클로버의 향연에는 휴가를 내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제대 후 진주농대에서 열린 클로버의 향연에 참석한 그는 연구논문발표대회의 선배 몫으로 주어진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또 한 번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갖게 된다. 바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모두 12명이 발표했는데, 정 박사는 심사평에서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남의 것을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고 호되게 질책했다. 그 가운데 발표자의 한 명이었던 이상윤이라는 회원이 엽서를 보내와 공부할 책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상윤이 남자인줄만 알았던 그는 대구에서 열린 대학4-H 모임에 가서 “여기 이상윤이란 놈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놈은 없고 년은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침 이상윤 회원은 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 대답을 한 후배가 바로 지금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었다. 이후 숫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8-H’가정을 꾸미게 되었다.
석사학위 논문도 4-H관련 연구
정 박사는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그의 공부 이력 또한 특이하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던 그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없다고 해 모교인 충북대 대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는 서울대에서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훌륭한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사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농산물유통학은 전남대 농경제학과 김성훈 교수, 사회과학입문은 건국대 김병태 교수, 농업법은 이화여대 최병욱 교수, 민족경제론은 서울대 박현채 교수 등을 찾아 도강(?) 하거나 책을 추천받아 공부하는 등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건국대 ‘농업문제연구소’에서 이우재 선배와 함께 연구원으로 발을 들여놓았으며, 김성훈 교수의 추천으로 농림부 ‘국립 농업경제연구소’에서 연구업무를 계속하게 된다. 1978년 이 연구소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으로 발족되면서 창설멤버로 참석해 2006년까지 연구원, 책임연구원, 연구위원, 선임연구위원, 부원장으로 일했다. 연구원으로서 그가 올린 첫 작품은 ‘농지세문제연구’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농어민복지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그는 1980년 일본에 출장 가서 일본의 사회보장제도가 1900년도 독일제도를 그대로 복제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독일의 제도가 일본에서 어떤 변환과정을 거쳤는지를 알면 한국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농어민 사회보장제도 만들어
1982년 독일에 간 그는 괴팅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1986년에 돌아와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을 만들고 고치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면 “엄청나게” “많이”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탄생시킨 것이 ‘의료보험통합법안’이었다. 그 과정에서 통합주의자와 조합주의자의 싸움이 치열했고 결국 관련부처 담당 국장이 사임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농어민연금제도 또한 정 박사의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농민연금제도팀에 합류한 그는 1년 동안 매주 두 번씩 새벽 6시에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조찬모임을 갖고 9시에 농경연으로 출근을 했다.
이처럼 농어민 복지 정책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한 정 박사는 1991년도에 ‘농어촌 복지제도 개발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복지연구가 각개전투였다면 이 연구는 종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복지’를 그는 일찍이 연구하고 제도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앞장서 왔던 것이다.
이밖에 수많은 연구물을 내놓은 그는 정책분야, 농촌사회 및 교육, 농촌인력, 농민단체, 농촌복지 등 분야가 다양하다. 따라서 정부 각 부처마다 거의 모두 발을 걸치게 되었다. 그는 세 차례나 대통령포장을 받았는데, 국민건강보험통합공로, 풍수해보험 도입 및 재해대책공로, 국가균형발전과 신활력사업공로 등 공로분야가 각각 다르다.
정 박사는 한국농수산대학 총장(2006~2008년), 청와대 농어촌비서관 및 농어촌대책팀장(2003년),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2003) 등 공직에서도 활동하며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데 힘써왔다.
현재 한국농촌기술자협회 50년사를 집필하고 있는 그는 대학4-H 50년사 발간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한국4-H본부 부설 농촌청소년문화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4-H에 힘을 보태고 있다. 농업 및 농촌 그리고 4-H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가득한 정 박사가 훌륭한 경륜으로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해 본다.
<조두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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