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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리더십과 펠로우십을 발휘했다"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일제강점기, 광복 후의 만성적 사회 무질서와 무능한 정부 관료들의 매관매직 및 축재, 이념 마찰 속에서 우리는 세계 최하위 빈곤국의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불안 탓’이라고 직감한 우리 대학4-H연구회원들은 과거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탁월한 리더십과 펠로우십을 발휘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자발적 동기로 시작된 대학4-H연구회 조직활동은 세계 어디에도 전례가 없는 유일한 것으로서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농촌청소년 사회교육과 농민들의 건전한 지도자 배출을 목적으로 험난한 농촌건설의 최일선에 용감히 투신해, 전통적 가치관 재창출과 사회경제적 향상을 위해 노력한 대학4-H활동이야말로 한국 근대 농업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문화사에 빛날 업적이라고 단언한다.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 지방대학 4-H회원이 80년대에 남겨둔 글 한 구절을… ‘봄 새싹과 더불어 푸르름이 캠퍼스를 수놓고 있다. 30년 전의 4월도, 자연의 풍요함은 여전하였을 것이며, 단지 변화된 것이라곤 젊은이의 의식과 교외환경 뿐이다.’라고. 이 한 구절에 대한 감상과 정서는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 e Bernard Show, 1856~1950)는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에도 너무 아깝다.’라고 청춘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젊음으로 화려해야하는 것이 청춘이다. 우리 대학4-H회원들은 그 소중함을 ‘흙의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고귀한 젊음을 아낌없이 과감하게 바쳤다.
대학4-H연구회가 이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이 1947년, 서울대 농대생 10여명이 주동이 되어 인근 4-H회원들에 대한 과제활동과 토론, 봉사활동을 펼친 것을 그 시작으로 한다. 6.25전쟁 약 10년 후인 1957년 현대적 농촌교도사업이 우리 농촌에 도입됐다. 그 후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개편되면서 4-H운동에 대학생들이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또한 많은 대학생들은 그들의 선진지식을 바탕으로 농촌지도공무원으로 봉사, 그들의 꿈인 한국 농촌의 근대화사업 현장에 투신했으며, 4-H운동 승화와 농촌생활 향상에 적극 참여해 국가 현대화 실현의 역군이 되었다.
한국의 대학4-H연구회 태동기인 1954년 여름, 필자는 서울농대 학생들과 빈번히 접촉하게 된다. 당시 필자에게 부여 된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사명이 한국4-H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조직 발족 실무업무였다. 동 위원회 첫 총무로 선임된 김웅각 총무와 전국 농대와 농고를 순회, 4-H확산을 위한 학생대상 순방강연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필자는 4-H운동과 농촌교도사업, 김 총무는 청소년들의 역할과 한국농업의 미래에 대하여 열변을 베풀었다.
서울대 농대생들의 요청을 받고 80여명의 학생들에게 앞에서 첫 강의를 진행한 것도 195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다음해인 1955년 2차 강의에 응한 바 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학생이 충남 청양군 출신 명의식(후에 축협중앙회장, 한국4-H본부회장 역임) 학생이다. 명 군은 몇몇 뜻을 함께하는 학생들과 발족된 지 일천한 4-H중앙위원회 업무지원도 성심껏 지원하는 아량도 보였다.
1950년까지 우리 농촌은 죽지못해 살아가는 지경이었다. 6.25전쟁은 설상가상 우리들의 생활수준을 반세기 가량 후퇴시켰다. 절대빈곤 속에서 구제불능상태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농촌을 목가적 평화스러운 고장으로 구가(謳歌)하는 무지몽매한 인사들도 허다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4-H운동이 태동하면서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봉사활동이란 새롭고 강력한 동력을 얻었다. 한국 대학생들의 거룩한 행동의 표현으로 발로된 것이 ‘대학생 농촌봉사활동’이었고, 그들의 농촌에 대한 시대적 행동 표출은 극찬을 받아 당시 내외 언론에 특필기사로 보도된 바 있다.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 중에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대상이 된 것이 바로 지역단위 4-H의 내실 충족과 과제 지도활동이었다. 다음은 여학생들의 생활개선 지도활동이었다. 후일 이들 대학생들이 농촌지도사업 공직자로서 진로 설정에 풍향기 역할을 하였음을 필자는 알고 있다. 후일 이들의 이상은 심훈이 쓴 ‘상록수’에 근대화된 농촌지도기술을 가미한 강력한 새로운 한국적 농촌지도사업 역군으로서의 사명감을 다하는 것이었다.
전국 각 대학에서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4-H연구회원들의 말없는 활동은 눈부셨다. 서울대 농대 4-H연구회 결성은 1955년 학생 67명으로 재 발대 된 것으로 기억난다. 후속활동으로 서울농대에서 전국 18개 대학 대표들로 구성된 전국 대학4-H연구회연합회가 발족된 때가 1962년이었음을 우리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서울 농대에서 개최된 제8회 중앙 4-H경진대회와 겸하였음은 의미심장했다.
한편 대학4-H연구회연합회의 기틀이 정상화됨에 따라, 1966년부터 전국 연합회 조직이 4개 지역별 연합회 중심으로 조직, 4-H지도와 연구행사, 토론회 등을 개최, 젊은 학도들의 진리 탐구와 연구 발표에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은 지금도 필자의 눈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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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6월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4-H운동 발전을 위한 기금모금 행사가 개최됐다. |
필자는 한국의 대학4-H연구회원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들의 생존권 가치를 지향하는데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 오늘과 같은 위대한 나라 건설에 아니 선진국형 나라로 인도했음에 찬사를 보낸다.
68년 전 한국4-H는 경기도 화성군 이목리의 한 가난한 자연마을에서 배움에 불타는 아이들의 자발적 욕구에 의해 그 시동을 본 후, 2014년에 세계 4-H지도사업 최선진국으로 추대되어 세계4-H운동 확대 재창출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전국 대학4-H연구회 출신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다시 되풀이하건대, 현명한 우리 대학4-H연구회원들은 앞으로도 확고부동한 신념과 성숙함을 최대한 발휘하여 미완성된 민족의 정체성 구현과 시민의식 계발에 더욱 진력하길 바란다. 비단 한국4-H운동뿐만 아니라 세계4-H운동 승화작업에 솔선 참여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화스러운 지구촌 창출에 다시 한 번 분투하길 바란다.
비온 후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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